7.4 남북 공동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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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72년 7월 4일 박정희의 대한민국 제3공화국과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발표한 공동성명.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합의한 것이다. 자주(自主), 평화(平和), 민족 대단결(民族 大團結)이라는 평화 통일 3대 원칙을 설정하였다.
2. 배경[편집]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여 막대한 인명피해와 돈을 쏟아붓고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던 미국은 1969년 자본주의 진영이 공산화의 위험에 노출되어도 스스로의 힘으로 방위해야 한다는 내용인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고자 하였다. 이어 미국은 중소결렬, 중소국경분쟁으로 소련과 관계가 최악으로 돌아선 중국과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화해를 이루었다. 6.25 전쟁 이래 적대관계를 유지하던 미국과 중국은 1971년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에 이어 1972년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고 닉슨-마오쩌둥 회담이 개최되는 등 화해가 이루어졌으며 당시 소련은 미국과 접촉해 상호 전략무기 제한 협정(SALT)을 맺는 등 트루먼 독트린, 6.25 전쟁 이래 첨예한 미국과 소련 간 갈등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는 데탕트로 불리며 1971년 유엔에서는 상임이사국을 역임하던 중화민국은 축출되어 탈퇴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임이사국에 올랐고 한반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972년 5월 2∼5일 평양에 밀사로 찾아가서 김영주 중앙조직부장과 회담했고 김일성을 만났다. 그리고 이어서 그 해 5월 29일부터 6월 1일 사이에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이 역시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해서 이후락과 이후 조율했고 역시 청와대에서 박정희를 만났다. 관련 기사
3. 상세[편집]
-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 통일 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한반도 남북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선 이래 남북은 서로를 '괴뢰 집단'으로 여기면서 오직 무력을 통해서만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처음으로 대화를 통한 통일 원칙에 합의한 것이었다. 휴전 이후 중단된 남북교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이전까지 밟았던 격렬한 대립 관계에서 벗어나 재개될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이 선언은 굉장한 사건이었으며 이 선언이 발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남북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들떴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는 '한반도 평화정착 → 상호 문호개방과 신뢰회복 → 남북한 자유총선거'라는 '평화통일 3단계 기본원칙'을 발표하였다.
4. 한계[편집]
이 선언의 취지인 데탕트라는 국제정세에 걸맞게 전쟁 이래 지속된 남북간의 상호적대를 끝마치고 그동안 금기시된 용어들을 삽입하고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이루는 단계에 이르자며 합의한 내용이지만 북한의 대남 도발사 중의 1970년대만 확인해 봐도 알 수 있듯이 휴지조각으로 버려졌다.[1]
공교롭게도 이 해 10월 17일 19시 계엄령을 선포해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정당 및 정치단체들의 활동을 중지시켰으며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 행정, 사법을 장악한 뒤 새 헌법을 만들었으며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를 주재하여 새 헌법을 의결시킨 후 제3차 국민투표로 대한민국 제4공화국이 출범했다.
같은 해 북한은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하여 조선로동당의 우월적 지위를 명시하고 주체사상을 헌법 규범화했으며(사회주의 헌법 제4조)[2] 주석 직위를 신설하여 여기에 김일성 본인이 취임함으로써 영구 집권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남북 수뇌가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였다는 비판이 주를 이룬다.
5. 남북한 국내 정치에의 활용[편집]
5.1. 북한[편집]
당시 국내의 상황을 보다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군사력이 열세에 놓였던 상황에서 1968년을 기점으로 무장간첩의 민간인과 군인에 대한 살상 및 선박납치 등이 연이어 벌어지자 평화무드로 전환해 국력을 증강하는 시간을 버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다. 상호간에 정권연장으로 이용하려면 국가원수들끼리 개인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불과 4년 전에 암살하려고 31명을 파견했던 데다 남한도 북파 암살조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드로윌슨센터가 발굴한 1970년대 남북 7.4 성명 이후 상황을 담은 루마니아 외교문서에는 북한이 남북대화를 추진한 속셈과 국제사회를 상대로 남한 정부를 고립시키려고 했던 이른바 '평화·선전공세'의 진면목이 잘 드러난다. 남북대화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기반을 흔들어 야당 진영의 집권을 도우려고 했음을 입증하는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남측과의 대화를 통해 남한 대중들에 혁명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울러 남한 괴뢰도당을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혼란상항으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의 평화공세가 이룩한 또 다른 큰 성과는 남한에 미군이 주둔할 어떤 명분도 없다는 점을 알릴 수 있었다.7.4공동성명서에서 우리가 남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음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7.4 공동성명은 '남북의 통일은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대단결의 원칙으로 이뤄야 한다'고 천명했다.”
“남한 혁명운동가들이 지하에서 그들의 활동을 전개해나갈 때 솔직히 현재의 상황은 이전에 비해 매우 우호적이다. 남북공동조절위와 남북적십자대화 등의 대화 채널에 남한의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야당세력 등 북한에 동정적인 세력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된다고 하니까 일부에서는 통일이 무르익어 가는 줄 알고 있는데, 이산가족 찾기라는 그 자체로서는 흥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적십자회담을 통해서 합법적 외피를 쓰고 남조선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트일 것 같으면 회담을 좀 끌어보고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것 같으면 남조선 측에서 당장 받아들일 수 없는 <반공법 철폐>, <정치활동의 자유>와 같은 높은 요구조건을 내걸고 회담을 미련 없이 걷어 치워야 한며. 회담이 진행되는 기간 이 회담장을 우리의 선전무대로 이용해야 합니다.
1972년 8월 제1차 남북 적십자회담(평양)이 개최될 때 김일성과 북한 측 회담 대표들과의 담화
7.4 공동성명 1주년이 되는 1973년 여름 남한에 대한 공격을 더욱 노골적으로 전개했는데 특히 유엔 동시가입을 추진한 남한에 대해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키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김일성은 1950년대 남로당, 소련파 숙청을 시작으로 1960년대 들어 정책에 반대 의견이나마 낼 수 있는 이들은 모조리 뿌리뽑히고 신적인 지위로 떠올랐는데 1971년에 평양을 방문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이에 감명받아 북한식 통치를 이어가던 중 세습까지 시도하려다가 죽음을 맞았다.
5.2. 대한민국[편집]
나는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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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되었지만 적어도 박정희 대통령은 7.4 남북 공동 성명을 체결한 후의 행보를 보았을 땐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맞다. 더욱이 7.4 남북 공동 성명 이후 10월 유신헌법을 완성으로 끝을 맺었기 때문에 위의 8월에 나온 루마니아의 외교문서는 김일성의 의도만 알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유신헌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위의 언급이 오히려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3] 3선을 간신히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이 이후 주변의 엄청난 반발 속에 10월 유신을 위한 여러가지 조치들을 취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바람과 반대로 국제 사회에서는 데탕트(긴장완화)라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미국의 눈치를 외면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이었고 북한의 김일성도 중소 갈등을 시작으로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공산진영에서 외톨이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물론 김일성이 북한 내부적으로 절대적인 1인자로 우뚝 섰지만 법적으로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김일성도 무언가 방안을 찾고 있던 찰나에[4] 국민 선거 없는 대통령을 꿈꾸었던 박정희와 서로 간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처럼 민족적 사명감을 저버린 무책임한 정당과 그 정략의 희생물이 되어 온 대의 기구에 대해 과연 그 누가 민족의 염원인 평화 통일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겠으며, 남북 대화를 진정으로 뒷받침할 것이라고 믿겠습니까, ... 이같은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줄기찬 예지와 불퇴전의 용기, 그리고 철통같은 단결이며, 이를 활력소로 삼아 어렵고도 귀중한 남북 대화를 더욱 굳게 뒷받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는 모든 체제의 시급한 정비라고 믿습니다.
우리 헌법과 각종 법령, 그리고 현 체제는 동서 양극 체제하의 냉전 시대에 만들어졌고, 하물며 남북의 대화 같은 것은 전연 예상치도 못했던 시기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국면에 처해서는 마땅히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하겠읍니다.
-10·17 대통령 특별 선언
6. 이후[편집]
통일의 원칙인 자주, 무력지양이 확립되었다.
박정희 정권 하에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북한에게 강경한 보수 입장에서도 부정하지 못하며 북한과의 대화를 중요시하는 진보(대한민국 기준)에서도 선언의 내용만은 인정하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2년 6.15 남북공동선언과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 2018년 판문점 선언도 이 선언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5]
공교롭게도 이 회담이 열릴 당시는 남북의 국력 차이가 가장 좁았을 때였는데 70년대는 북한의 리즈 시절이기도 했고 남한은 전쟁 특수와 계획 경제를 바탕삼아 고도성장을 시작할려는 찰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에는 남북간의 국력이 어마어마하게 벌어지고 재래식 무기들의 질이 남한이 압도적인 우위에 서게 되면서 북한 입장에서 자신들의 비대칭 전력 없이는 대등한 입장에서 회담하기는 어려워졌다.